유럽에는 왜 고층 빌딩이 적을까? (스카이라인, 높이규제)
파리에 처음 갔을 때 조금 의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도시인데도 뉴욕이나 서울처럼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이어지는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런던이나 파리 같은 도시를 자세히 보면 고층 건물을 지을 기술도, 자본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고층 업무지구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합니다.
유럽은 고층 빌딩을 못 지은 것이 아니라, 왜 많은 도시의 중심부에서 높이를 제한해 왔을까요?

가설 1.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높이 지을 수 없었다?
절반은 맞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됐습니다. 광장과 성당, 궁전, 거리와 주거지가 이미 하나의 도시 조직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이런 도시에 초고층 건물 하나가 들어서면 건물 한 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서 바라본 도시의 윤곽, 거리에서 보이는 성당의 첨탑, 광장에서 바라보던 하늘의 모습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도시에서 건물의 높이는 단순히 한 필지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경관과 함께 다뤄집니다.
파리가 좋은 사례입니다. 파리의 현재 도시계획에서는 지역에 따라 건축물의 높이 상한을 다르게 정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높이계획에는 18m·25m·31m·37m 같은 기준이 사용됩니다.
즉 “파리에서는 12층 이상을 지을 수 없다”처럼 층수 하나로 설명하기보다, 도시의 위치와 경관에 따라 높이를 세밀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가설 2. 문화재 때문에 높은 건물을 아예 못 짓는다?
이것도 조금 다릅니다.
유럽 도시라고 해서 고층 건물을 모두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런던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시티 오브 런던과 카나리 워프에는 현대적인 고층 건물이 모여 있고 런던의 스카이라인 자체도 계속 변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런던은 특정 장소에서 바라보는 중요한 도시 경관을 별도로 관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세인트폴 대성당이나 웨스트민스터궁 같은 랜드마크를 바라보는 조망입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때 지정된 조망 안에서 랜드마크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계획 심사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빅벤이 1mm라도 가려지면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높은 건물 자체를 금지한다기보다, 어디에서 어떤 높이와 형태로 들어설 것인지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가설 3. 그렇다면 고층 건물은 도시 밖으로 밀어낸 걸까?
파리에서는 이 질문이 꽤 흥미로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파리의 전통적인 도심을 바라보면 비교적 일정한 높이의 건물들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시선을 멀리 돌리면 한쪽에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입니다.
라데팡스입니다.
역사적인 파리 중심부와는 다른 공간에 대규모 업무지구가 형성되면서 고층 오피스 건물들이 집중됐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유럽의 도시계획을 단순히 “고층 건물 반대”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보입니다.
필요한 고층 개발을 받아들이면서도 역사적인 도시경관과 충돌하는 위치는 피하거나 조정하는 방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런던 역시 고층 건물이 도시 전체에 균일하게 퍼져 있기보다는 특정 업무 중심지에 군집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설 4. 미국과 달리 고층 빌딩이 필요하지 않았던 걸까?
이 부분에서는 도시가 성장해 온 방식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말 미국에서는 철골 구조와 안전한 엘리베이터 같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높은 업무용 건물을 짓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됐습니다. 특히 땅값이 비싸고 업무 기능이 집중된 지역에서는 같은 땅에서 더 많은 바닥면적을 확보하는 수직 개발의 경제적 가치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모든 도시가 같은 조건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높은 건물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지을 수 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토지가격과 업무 수요, 교통 접근성, 도시계획 규제, 개발 가능한 토지, 건설비 등이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프랑크푸르트처럼 고층 업무지구가 발달한 도시가 있고, 런던처럼 여러 고층 클러스터를 가진 도시도 있습니다.
반대로 역사적인 중심부의 높이를 낮게 유지하면서 다른 지역에 개발 수요를 수용하는 도시도 있습니다.
결국 ‘유럽은 이래서 고층 건물이 없다’는 하나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낮은 스카이라인은 우연일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파리처럼 건축물의 높이를 도시계획으로 강하게 관리하는 도시가 있고, 런던처럼 중요한 조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특정 지역의 고층 개발을 받아들이는 도시도 있습니다.
도시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건물 하나의 높이보다 도시 전체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저는 파리의 낮은 지붕들 너머로 멀리 고층 건물이 따로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 차이가 조금 이해됐습니다.
낮은 건물과 높은 건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디를 낮게 남기고 어디를 높게 만들 것인지를 선택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고층 빌딩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이유를 단순히 돈이나 기술의 문제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역사적인 도시 조직과 경관, 높이규제, 토지와 개발 수요, 그리고 각 도시가 선택한 성장 방식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및 근거: 파리 PLU 바이오클리마틱 건축물 높이 상한 자료 (프랑스 공공데이터), 런던 조망관리체계(London View Management Framework) 관련 정책 (런던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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