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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처음 갔을 때 저는 솔직히 좀 의아했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들이 모인 대륙인데, 왜 도시 어디를 봐도 하늘을 찌르는 빌딩이 없는 걸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안 짓겠다는 선택이었습니다. 유럽 전체 GDP는 세계의 21%를 차지하지만, 150m 이상 고층 빌딩은 전 세계의 3%도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에펠탑과 낮은 건물들이 이어진 파리 스카이라인과 멀리 보이는 고층빌딩

스카이라인을 낮게 유지하는 이유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기 드 모파상이 에펠탑 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웃음이 먼저 나왔습니다.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그 안이라서 그랬다는 건데, 생각해보면 이게 단순한 일화가 아닙니다. 유럽인들이 얼마나 도시의 시각적 풍경, 즉 스카이라인(skyline)에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스카이라인이란 건물과 하늘이 만나는 도시의 외곽선을 뜻하는데, 유럽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관이 아니라 도시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유럽 도시의 구조는 그리스의 폴리스(polis)에서 출발합니다. 폴리스란 신전을 중심으로 광장과 골목이 유기적으로 뻗어 나간 고대 그리스의 자치 도시 국가를 말합니다. 이 구조가 로마를 거쳐 중세를 지나면서 성당과 광장 중심의 도시 형태로 자리를 잡았고, 지금의 유럽 도시에도 그 뼈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피렌체 구시가지 골목을 실제로 걸어봤을 때, 500년 전 지도를 들고 다녀도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세계 초고층 도시 건축 학회 CTBUH(Council on Tall Buildings and Urban Habitat)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150m 이상 고층 빌딩은 전 세계에 7,212개가 있습니다. 유럽은 유럽 전체를 합해도 281개로, 한국보다 적습니다(출처: CTBUH). 그나마 있는 것들도 이스탄불, 모스크바,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다섯 도시에 70%가 몰려 있습니다. 나머지 수백 개의 유럽 도시에서는 현대적인 고층 빌딩을 단 한 채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모든 게 폐허가 된 그 시점에서 유럽은 미국식 고층 빌딩을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지친 유럽인들이 선택한 건 고층 건물이 아니라 오래된 성당과 궁전을 복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선택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대성당의 첨탑이 다시 하늘에 솟아오르는 장면이 얼마나 큰 위로였을지 조금은 짐작이 됩니다.

  • 유럽 GDP는 세계의 21%이지만, 150m 이상 고층 빌딩은 전 세계의 3% 미만
  • 유럽 전체 고층 빌딩 281개 — 한국보다 적은 수치
  • 2차 대전 후 유럽은 고층 개발 대신 역사 건축물 복원을 선택
  • 도시의 정체성은 스카이라인에 담겨 있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음

요약: 유럽이 고층 빌딩을 짓지 않는 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2,000년 도시 역사와 전후 정체성 회복의 선택이 낳은 결과입니다.

건축규제와 도시정체성의 충돌

유럽이 고층 빌딩을 꺼리는 심리에는 은근한 문화적 경쟁 심리도 섞여 있습니다. 제 경험상, 유럽 사람들과 건축 얘기를 나눠보면 뉴욕 마천루에 대한 반응이 묘하게 엇갈립니다. 인상적이라는 말 뒤에 꼭 "하지만 우리 도시에는 어울리지 않죠"라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이게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브뤼셀화(Brusselization) 현상을 공부하고 나서였습니다.

 

브뤼셀화(Brusselization)란 역사적 건축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기능 위주의 현대 건물을 무분별하게 들여서 도시 경관과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20세기 중반, EU의 사실상 수도가 된 브뤼셀이 기구 청사를 짓기 위해 역사 지구를 허물면서 유럽 전역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이 사건이 오늘날 유럽 각국의 엄격한 건축 규제(building regulation)를 낳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축 규제란 건물의 높이, 외관,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법으로 강제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그 결과가 지금도 현장에서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파리는 시내 중심부에서 12층 이상을 지을 수 없습니다. 런던은 한술 더 떠서, 새 건물이 세인트폴 대성당, 빅 벤,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조망을 단 1mm라도 가리면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런던 도심에서 높은 곳을 찾아 사방을 둘러봤을 때, 수백 년 된 랜드마크가 현대 건물 사이에서도 여전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걸 확인했는데, 이게 우연이 아니라 규제의 산물이라는 걸 그때 실감했습니다.

고층 건물이 처음 탄생한 건 19세기 미국 시카고였습니다. 철골 구조(steel frame structure)란 건물의 하중을 벽이 아닌 철골 뼈대가 지탱하게 만드는 공법으로, 이를 통해 비로소 하늘 높이 쌓아 올리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당시 폭발적으로 인구가 몰린 시카고는 이 공법과 엘리베이터의 발명을 조합해 공간 부족 문제를 수직으로 해결했습니다. 반면 유럽은 수백 년에 걸쳐 인구가 천천히 늘었고, 공간이 부족하면 성벽을 허물고 옆으로 넓히면 충분했습니다. 인구 급증이라는 압박 자체가 없었으니 고층 빌딩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출처: UN 세계 도시화 전망).

 

그렇다고 유럽이 고층 빌딩을 영원히 거부하는 건 아닙니다. 파리 외곽의 라데팡스, 런던의 시티 오브 런던처럼 역사 지구와 분리된 구역에 현대 건물을 따로 모아두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꽤 영리한 해법이라고 봅니다. 전통과 현대를 충돌시키는 대신 각자의 자리를 정해준 셈이니까요. 반면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163층),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메르데카 118 같은 국가 위상 과시용 초고층 경쟁에는 유럽이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미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나라들이 굳이 높이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요약: 브뤼셀화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엄격한 건축 규제를 도입했고, 역사 지구와 현대 건물 구역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도시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유럽에 고층 빌딩이 적은 가장 큰 이유가 뭔가요?

A. 한 가지 이유보다는 여러 요인이 겹쳐 있습니다. 수백 년에 걸친 느린 도시 성장으로 공간 부족 압박이 없었고, 2차 대전 후 역사 건축물 복원을 선택한 정서적 배경, 그리고 브뤼셀화 사건을 계기로 각 도시에 도입된 엄격한 건축 규제가 함께 작용한 결과입니다. 어느 하나만 따로 놓고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Q. 파리에 정말 12층 이상 건물을 못 짓나요?

A. 파리 시내 중심부에서는 현재도 12층 이상 건물에 엄격한 제한이 있습니다. 다만 라데팡스처럼 지정된 현대 업무 지구에서는 예외가 적용됩니다. 역사 지구와 현대 지구를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방식으로 운영 중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Q. 브뤼셀화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A. 브뤼셀화(Brusselization)는 역사적 건축물과 도시 경관을 무시하고 기능 위주의 현대 건물을 무분별하게 건설해 도시 정체성을 훼손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20세기 중반 브뤼셀이 EU 기구 청사를 짓는 과정에서 역사 지구를 대거 철거하면서 이 용어가 생겨났고, 이후 유럽 건축 규제 강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Q. 유럽 고층 빌딩 숫자가 한국보다 적다는 게 사실인가요?

A. CTBUH 통계 기준으로 150m 이상 고층 빌딩 수를 비교하면, 유럽 전체를 합산해도 281개로 한국보다 적습니다. 그나마 이 숫자도 이스탄불·모스크바·런던·파리·프랑크푸르트 다섯 도시에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어, 나머지 대부분의 유럽 도시에서는 현대적 고층 빌딩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결론

유럽의 낮은 스카이라인은 가난해서도, 기술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2,000년 도시 역사가 쌓아온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이고, 브뤼셀화라는 뼈아픈 실패에서 배운 교훈의 산물입니다. 제가 유럽 도시들을 돌아보면서 느낀 건, 그 낮고 오래된 골목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높이로 압도하는 대신 깊이로 설득하는 방식이랄까요.

앞으로 유엔 전망대로 유럽의 도시화가 계속된다면, 전통적인 저층 스카이라인과 현대 고층 건물이 어떻게 공존할지가 진짜 과제가 될 것입니다. 라데팡스나 시티 오브 런던 같은 분리 모델이 답이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해법이 나올지, 저는 그 변화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